암을 연구하는 의학자들이 모여 암의 발병요인이 되는 새로운 물질들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학회모임에서의 최종 결론은 "우리는 암유발 물질 투성이의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스트레스'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결론이다. 우리의 삶은 갖가지 자극과 이에 대한 반응의 연속인데,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스트레스다. 물론 스트레스는 반드시 우리에게 나쁜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격무에 시달리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휴가를 준비하는 들뜬 마음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있기 때문이다.

앞의 것을 흔히 '불쾌 스트레스(distress)'라 하고, 뒤의 것을 '유쾌 스트레스(eustress)'라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에게 가해지는 모든 자극들은 곧 스트레스이며 그야말로 '인간은 스트레스의 풀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례

금년 46세의 K부인은 새벽 5시를 알리는 시계 알람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고3인 딸의 도시락을 싸야 하고, 딸아이를 일찍 깨워야 한다. 아침에 잠 좀 푹 자봤으면 하는 것이 최근 몇 년간의 소망이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딸아이를 채근해서 학교에 보내고 나면 이번엔 직장인 남편과 대학생인 두 아들도 깨워야 한다. 모두가 두세 번 이상씩 들락거리며 소리를 질러야 겨우 일어나면서도 한결같이 찌뿌둥한 표정들이다. 더구나 최근 남편의 표정을 훔쳐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상사가 됐다. 중소기업체에서 25년간 성실히 근무해 온 남편이지만 최근의 경제한파로 인해 언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오늘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만 내뱉듯이 하고 집을 나선다. 그때마다 가슴이 방망이질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뭔가에 쫓기듯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정말로 남편이 실직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해지고 어찔어찔한 느낌이 든다. 대학교 졸업반인 큰아들도 요즘 심사가 편치 않은 듯하다. 대학공부만 시키고 나면 척척 취직자리를 찾는 줄 알았는데 직장을 구하기는 커녕 아르바이트 자리도 못 얻을 지경이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용돈을 요구하는 것도 이젠 짜증스럽게만 느껴진다. 대학교 2학년인 둘째아들은 원래 공부에 큰 흥미도 없었지만 내년에 군대에 간다는 핑계로 매일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신다. 술 좀 덜 마시고 일찍 들어와서 공부하라는 채근도 요즘은 '쇠귀에 경읽기'이고 이제는 잔소리도 하고 싶지 않다. 둘째아들은 어릴 때부터도 속을 많이 썩여 온 아이라 그런지 부딪치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서로 혈압만 오른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듯 소란한 끝에 다들 집을 나가고 나면 온몸에 피로가 덮친다. 잠깐 신문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우유값, 신문값, 심지어 보험판매원까지 …… 아예 초인종을 없애고 전화코드도 빼놓고 싶다. 밀린 빨래를 하고 집안청소에 정리정돈을 해놓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가족들이 집에 있으면 있는 대로 바쁘지만 모두가 자신에게 요구만 할 뿐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없다. 또 막상 혼자 있으면 뭔가 허전하고 외롭고 허무감이 몰려올 때가 있다.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고 싶다.

건강관리를 위해 최근 수년간 하루에 한 시간씩 수영장을 다녔는데 그래도 나이 탓인지 체중이 늘고 아랫배가 많이 나왔다. 예전에 입던 옷을 입을 때마다 허리가 꼭 끼고 신경질이 난다. 그나마 수영하러 가는 시간은 좀 활기가 나고, 이웃 부인들과 어울리는 것만이 하루중 유일한 기쁨이다. 바로 동네에 있는 수영장이지만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갈 것인가, 무슨 얘기를 하며 즐겁게 보내고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저녁이 되어도 일찍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마음이 한가로운 것도 아니다. 뭔가 걱정이 가득한 마음이고 불안하다. 무엇보다도 다음달에 있을 딸아이의 수능시험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그래도 자녀 셋 중에서는 가장 큰 기대를 갖게 한 아이다. 이 딸만은 제법 일류대에 넣기 위해 꽤 정성도 기울여왔다.

최근에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 불안하다. 열심히는 하건만 아무래도 고액과외 같은 것을 못 시켜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마음이 괴롭다. 밤 12시에 들어와서 새벽 두 시까지 공부를 하는데 나만 잘 수도 없고 뭐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마루 소파에서 쪼그리고 자곤 한다. 남편과의 잠자리도 벌써 두 달째는 없는 듯하다. 가끔 남편은 은근히 잠자리를 요구해 오지만 아이들 신경이 쓰여서 거부도 하려니와 요즘은 솔직히 의욕도 매우 줄었다.